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Jinhee 2024-07-25 (목) 22:25 8개월전 37  


     
 
노력해라! (네네,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라! (이미 최선인데, 여기서 더요?)
인내해라! (평생을 참기만 하며 살았다고요)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시키는 대로 살았다.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이 진리라 생각했고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어째 점점 더 불행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그야말로 기분 탓일까?  꼭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나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아니, 후회라기보단 억울함이다. 10분만 더 올라가면 정상이라고 해서 참고 올랐는데, 10분이 지나도 정상은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진짜 지금부터 딱 10분. 그 말에 속고, 또 속고. 그렇게 40년 동안 산을 오르고 있는 기분이다. 그야말로 환장할 기분이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조금만 더 올라가 볼 수도 있다. 계속 열심히 살다 보면 뭔가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지쳤다.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이다. 에라, 더는 못 해 먹겠다. 그렇다. 마흔은 한창 비뚤어질 나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결심했다. 이제부터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지금 우리에겐 노력보단 용기가 더 필요한 것 같다.   
무모하지만 도전하는 용기.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말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신교육을 받는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돼.”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노력하지 않고 얻은 성공은 비겁한 거야.”    이런 교육 말이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신앙처럼 품고 살아간다. 이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세상을 좀 살아보면 알게 된다. 아니, 살면 살수록 아니라는 것을 더 크게 느낀다고나 할까? 그래서 혼란스러운 거다. 우리의 가치관이 흔들리니까.

열심히 하지 않고 별다른 노력하지 않아도 다 가진(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데 점점 빈곤해지는 사람도 있다. 수백 번의 오디션을 본 후에야 배우로 데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구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쉽게 데뷔하는 사람도 있다. 멀리서 예를 들 것도 없다. 공들인 작업은 별다른 성과를 못 냈는데 대충대충 한 작업은 좋은 성과를 낸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반드시 ‘이만큼’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괴로움의 시작이다. 보상은 언제나 노력한 양과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한 것보다 작게 혹은 더 크게 주어진다. 어쩌면 아예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원래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 노력으로 다 된다는 말도 거짓말이지. 알겠어? 네 노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는 이야기야.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열정 없인 이룰 수 있는 게 없다고. 열정에 관한 명언과 책들, 그리고 죽은 열정도 다시 살려준다는 강연이 넘쳐난다. 
회사는 어떤가. 회사는 사원들이 애사심을 가지고 일에 열정을 쏟길 바란다. 우리의 회사는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왜냐면 회사는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 말고, 열정을 가지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열정을 ‘증명’해야 한다. 야근으로 말이다. 정시에 퇴근하면 열정이 없는 거다. 그런데 회사는 성장하는데, 왜 나의 월급은 성장하지 않는 걸까? 이런 쌍쌍바! 함께 성장한다고 하지 않았나?

끝이 없다. 나이에 걸맞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우리 사회엔 ‘이 나이’면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인생 매뉴얼’이라는 게 존재한다. 실제로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모두가 그걸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나만 뒤처지는 것 같으니까. 

내가 이 나이에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내 나이에 걸맞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나만의 가치나 방향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내가 욕망하며 쫒은 것들은 모두 남들이 가리켰던 것이다.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게 부끄럽다.

나도 부자가 되고 싶었다. 겉으로는 “나는 부자까진 바라지 않아. 그냥 돈 걱정 안 하고 살 정도로 벌었으면 좋겠어.”라고 점잔을 떨었지만, 그 말이 결국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겉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부자를 갈망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필요 이상의 많은 돈을 갖고 싶었다. 써도 써도 줄지 않을 돈을. 하지만 나는 부자가 되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서로 “부자 되세요.”라고 응원해주던 국민 대부분이 부자가 되지 못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우리 대부분은 왠지 모를 패배감과 자괴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됐다.

조금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길들이 있는데, 그때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하나,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길은 절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그 길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가보면 그 길이 자신이 원하던 길이 아닌 경우도 많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싫어한다. 목숨 빼곤 다 포기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쉽게 포기하며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하는 목표가 있으면 노력도 하고,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 그렇게 두세 번 도전했는데도 안 되면 과감히 포기하는 게 맞다. 나처럼 4년 혹은 그 이상 매달리는 것은 집착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처럼 잔혹한 말은 없다. 그 목표를 절대 포기할 수 없어서 자신의 목숨을 끊다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어떤 길을 고집한다는 것은 나머지 길들을 포기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득도’하고 ‘포기’하게 된 이유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젊은이들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정말 무책임하고 손쉬운 해석이다. 사회가 개개인의 모든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꿈을 꾸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세상, 열심히 일하면 내 집 하나 정도는 마련할 수 있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어떤 사람이 꿈꾸지 않고 미래를 포기하겠느냐는 말이다. 노력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의 꿈을 빼앗고 포기하게 만든 건 세상이다.  사토리 세대는 자신의 선택으로 득도의 길로 가게 된 것이 아니다. 선택할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다. 그야말로 ‘뜻밖의 무소유’ 신세다.  희망 없이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희망이 없으면 죽음을 택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사는 걸 택했다. 어쩌면 스스로 욕망이 없다고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결코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라도 인생을 살아 내고 싶을 뿐이다.

청춘이 끝나서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다. 그 이유는 청춘의 열병을 심하게 앓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어둡게만 보이던 시절, 그때는 하고 싶은 것과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갈팡질팡 방법도 모르고, 용기도 없고, 그저 삶에 끌려다니는 기분이었다.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자주 화가 났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참 많이도 앓았다. 몸은 늘 뜨거웠고 숨은 잘 쉬어지지 않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뜨겁지는 않다. 열이 많이 내렸다. 다행히 열이 내렸다고는 하지만 그 시절에 했던 고민과 불안은 여전하다. 앞날은 늘 불투명하고 현실의 문제들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으며 여전히 답도 용기도 없다. 나이가 들어도 삶에 끌려다니는 기분은 여전하다. 나이가 들면 고민도 덜하고 눈앞이 좀 뚜렷해질 줄 알았는데, 지금과 똑같다고? 청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아마 절망할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나도 환장하겠다.

우리는 인생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믿지만, 한낱 파도에 휩쓸리는 힘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계단의 시작과 끝을 다 보려고 하지 마라. 그냥 발을 내딛어라.  _마틴 루터 킹

그림을 그리다 보면 종종 손가락이 아프다. 나는 손가락이 왜 아픈지 알고 있다. 연필을 너무 세게 쥐어서다. 이건 나의 오랜 습관이다. 그림에 집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연필을 세게 쥔다. 필요 이상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다 보면 손가락에 쥐가 나기도 한다. 연필을 세게 쥐면 더 잘 그려지냐고? 천만의 말씀. 오히려 잘 안 그려진다. 선은 딱딱해지고 원하는 방향으로 잘 나아가지 않는다. 너무 꽉 눌러 그린 탓에 지우개로 지워도 연필 선이 그대로 남는다. 잘 그리는 요령은 손에 힘을 빼는 것이다. 연필이 손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쥐고 그려야 더 잘 그려진다. 당연히 처음엔 가볍게 쥐고 시작하지만,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러니 내가 그림을 못 그리는가 보다. 간단해 보이지만 힘을 빼고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잘 하고 싶어서, 틀리고 싶지 않아서. 이런 마음 때문에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어간다는 건 경직된다는 것, 유연하지 않다는 것,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뭐든지 힘이 들어가서 잘 되는 걸 못 봤다. 그림도, 노래도, 운동도 어쩌면 인생도 그럴지 모르겠다. 너무 힘이 들어간 탓에 내 인생도 이렇게 삐뚤빼뚤해진 게 아닐까? 힘이 들어가니 힘이 드는 게 아닐까? 인생을 막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인생 앞에선 누구나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잘 살고 싶어서 필사적이다.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꽉 쥐니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힘을 주고 버티느라 어깨가 단단하게 뭉친다.

어른들은 노는 걸 싫어한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악시하는 것 같다. 그들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린 나를 협박했다. 봤지? 노는 건 이렇게 나쁜 거야. 나는 겁을 먹었다.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노는 대가가 베짱이처럼 빌어먹고 사는 거라니. 어느새 노는 것은 무의식에 죄악으로 자리 잡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른 개미가 됐다. 열심히 곡식을 모았지만, 그걸로는 집도 하나 살 수 없었고, 간신히 먹고사는 정도였다. 그래도 빌어먹지는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빌어먹을 베짱이, 보고 있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오다가다 한 번쯤 봤을 한 리조트 회사의 유명한 광고 카피다. 그 카피를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그 글을 읽자마자 당장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아, 저곳에 가고 싶다. 하지만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내 주제에 무슨……. 그렇게 씁쓸한 마음을 대충 주워 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왜 그곳에 가고 싶었던 걸까?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욕망을 부추긴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라는 문장이었다. 사실 나는 리조트에 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해야 할 의무로만 가득한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며칠 휴가를 내고 리조트에 간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이런, 내가 정말 원하는 것도 모르고 리조트에 가고 싶다고 착각했다. 그러고 보면 누가 썼는지 카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썼다. 내 주머니를 터는 데 거의 성공할 뻔했으니 말이다.

‘받은 만큼만 일한다.’  ‘퇴근 시간을 지킨다.’  ‘효율적이고 쉬운 방법을 찾아 일을 처리한다.’  하지만 이렇게 일을 했다간 온갖 비난을 받을 것이 뻔하다. “이게 최선인가요? 제가 보기엔 열정이 부족한 것 같군요.”  “당신, 이 일을 너무 쉽게 보는군. 당신 말고도 이 일을 원하는 사람은 많아.”  “이렇게 요령이나 부리고 있고, 정말 한심하군요.”  모두가 열심인 세상에선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열심히 하지 않은 내가 잘못한 거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언제나 사람

나의 아버지는 확실히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시절에는 나쁜 아버지가 많았다. 내가 자란 환경이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내 친구들의 아버지들 역시 좋은 아버지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엄살 부리고 싶지는 않다.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참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무튼.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항상 생각했다. 
‘절대로 아빠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나는 가끔 아버지가 느꼈을 무력감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가난을 물려받았고 어떡해서든 잘 살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일하는 걸 싫어하지는 않았으리라. 힘든 막일로 여기저기 다치고, 적은 보수와 주위 사람들의 무시에 점점 지쳐갔을 나의 아버지. 배운 게 없어 다른 일을 할 기회도 방법도 몰라 좌절했을 아버지. 희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자의 절망과 분노.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고, 울부짖고, 자신이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때리는 것뿐이었다. 

일단 부딪쳐보는 거다. 실패했을 땐 후회하면 되지.  _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중에

유행하는 패션을 따라 입지는 않는다. 나만의 취향이 있다. 프린트나 장식이 없는 심플한 디자인, 돈을 더 들이더라도 좋은 재질, 몇 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을 베이식. 이런 기준들은 숱한 실수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옷이 나에게 왔다가 갔다. 옷 좀 입는다는 개그맨 홍록기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요단강 몇 번은 건너갔다 와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을 수 있다.”  나 역시 그 강을 몇 번 건너갔다 왔다. 한때는 개성을 찾는답시고 튀는 옷만 입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니 패션 테러리스트였다. 사진을 안 남겨두어서 다행이다. 지금 내 패션은 튀지 않는다. 평범하다. 그래도 가난한 티는 나지 않는다고 자평하고 있다. 엄마, 이번엔 성공이에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미래는 어둡고, 현실은 궁핍했던 나의 20대. 꿈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들도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팍팍한 나날들과 앞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는 중압감과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안개처럼 짙게 깔렸던 젊은 날. 방황과 불안으로 지새웠던 숱한 밤들. 술은 또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돌이켜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이이기도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고민이 많았다. 내가 좀 더 용기가 있거나 무모한 사람이었다면 고민할 시간에 많은 일을 시도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됐을까? 지금 내 모습이 싫은 건 아니지만 궁금하다. 상상 속 다른 모습의 내가…….  내가 선택하고 한 일들에 대해선 결과가 좋든 나쁘든 잘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들은 왜 이리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다. 너무 쉽게 놓아버린 꿈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했던 사랑……

시대가 변했는데 여전히 교육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낡은 가치관을 강요한다. ‘꿈’이 아닌 ‘성공’을 가르치는 교육 말이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꿔 젊은이들에게 꿈을 꾸라고 말한다. 마음껏 꿈을 펼치라고. 마치 한 가지 길밖에 없다는 듯 대기업과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라고. 맞는 소리임에도 이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꿈을 꾸고 이루는 것이 어려운 ‘정답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 그 길로 안 가면 손가락질 받는다.

왜 한국인들은 늘 한 가지 길이 정답인 것처럼 우르르 몰려가는 걸까?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집단적이다. 한때 은퇴한 중년들이 모두 치킨집을 열었다는 우스갯소리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다양성이 결여된 정답 사회다.

남들과 꼭 속도를 맞춰 살아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이 살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왜 똑같이 맞추려고 애를 쓰고, 뒤처지면 불안해하는 걸까? 그리고 설령 뒤처지고, 느리다고 한들 그게 큰일일까? 사람은 각자의 속도가 있다.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남들과 맞추려다 보면 괴로워진다. 남들과 다르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남들과 전혀 다른 삶이 된다. 개성이다. 오우, 유니크!

혹시 지금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면 아마도 뒤처진 게 맞을 거다. 하지만 뒤쫓을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속도와 길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느린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인정하자. 우린 뒤처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뻔뻔함이 너무 좋다.

‘꿈꾸던 대로 되지 않았으니 내 인생은 실패한 걸까?’ 누구나 꿈꾸는 모습이 있다. 몇몇 사람은 그 모습을 이루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꿩’ 대신 주어진 ‘닭’ 같은 삶인 것이다.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닭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고민에 빠진다. 누군가는 닭을 꿩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마지못해 닭을 먹는다. 또 누군가는 이게 아니라며 닭을 아예 외면해버린다.

기대에 못 미치는 지금의 내 모습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꿈을 이뤄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꿈이 뭐라고. 꿈을 이룬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루지 못해도 그만이다. ‘에이, 아쉽다’ 정도로 훌훌 털고 지금 주어진 삶에서 행복을 찾아 누리기에도 짧은 생이다. 꿈꾸던 대로 되지 못했다고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 누군가는 루저들이나 하는 ‘자기 위로’, ‘자기합리화’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고 다그치겠지.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자기 위로’나 ‘자기합리화’가 나쁜 것일까? 자기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려 스스로 위로하고 합리화하는 게 잘못된 것일까? 나는 내 삶을 더 사랑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몇천 번이라도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이다.

인간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를 찾기보단 불행한 이유를 찾는 데 평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마조히즘(masochism)일까.

우리는 이나영이 원빈과 결혼했다고 해서 미칠 것 같은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 빌 게이츠가 가진 엄청난 부에 잠 못 이루지도 않는다. 우리를 미치게 하는 건 나와 동등한 사람들이라 믿었던 이들이 가진 ‘나에게 없는 것’이다. 애초에 ‘넘사벽’은 동경의 대상일 순 있지만 질투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니 부모님을 괴롭게 하는 게 다른 사람이 아닌 친구의 아들, 딸인 게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끼리 서로 비교하며 네가 잘 났네, 내가 잘 났네 도토리 키 재기 하며 사는 게 인간의 세상인가 보다. 이 모습을 저 높은 곳에서 보는 이가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아이고, 의미 없다.

잡지는 엘리스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했다. 잡지는 지금 입은 옷을 한 해 더 입어도 된다든지,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든지, 유명한 사람을 안다거나 침실 색깔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의상 난을 보면 자신의 옷장에는 없는 옷 때문에 서글펐고, 여가 난을 보면 자신이 가보지 못한 세계 곳곳의 햇살 눈부신 장소들이 떠올랐다. ‘삶의 스타일’이라는 난을 보면, 자신에게는 아마 제대로 된 삶도 없고 스타일은 틀림없이 없다는 느낌이 확고해져서 자존심이 상했다. 
_『우리는 사랑일까』 중에서   
그렇다. 잡지의 목적은 읽는 이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좌절감은 고도의 계산된 상술이다. 많은 사람이 명품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것을 쉽게 살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좌절감이 명품의 가치를 높인다. 좌절은 더욱 그것을 욕망하게 하고 기어이 그것을 산 사람들은 그제야 좌절감에서 벗어난 기쁨을 누린다. 동시에 아직 사지 못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좌절감을 안겨줌으로써 잠시나마 우월감도 맛본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나를 좌절시킬 것들은 끝없이 쏟아지니까.

나는 푸르른 초록에서 유한함을 본다. 곧 시들어 사라질 초록이기에 애틋하다. 내가 지나온 계절이기에 아름답다. 젊음이 영원하다면 소중할 이유도 없다.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겪는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젊은 시절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힘들었다. 젊음 그 자체는 좋지만, 다시 그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젊은 날은 뜨겁다. 속에 불이 하나 들어 있는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지만 때때로 너무 뜨거워 괴로운 여름은 X랄 맞게 빛나는 계절이다. 지나고 나면 다 좋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젊음은 좀 미화됐다. 조금은 쓸쓸하지만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지금이 더 좋다.

최근 연인과 이별한 친구가 있다.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며 너무나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잃는 거니까. 그 고통을 알기에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와, 그럼 이제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거네? 완전 좋겠다.”  그의 표정을 보니 실패다. 아무래도 나는 위로에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이런 걸 친구라고. 한 대 얻어맞지 않은 게 다행이다. 내가 친구에게 한 이야기는 반 정도는 웃으라고 한 이야기지만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헤어지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왕 헤어진 거 어쩌겠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솔직히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다른 사람에게 눈이 간다. 그 사람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일 수도 있고, TV에 나오는 연예인일 수도 있다. 내 옆에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은 어떨까 궁금해하고, 멋진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마음으로 내 옆의 사람과 비교하게 되어 있다.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웃음) 아무튼.

흔히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고 한다. 여기 성공한 사람이 있다. 그가 마냥 부럽겠지만 그 역시 성공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잃어야만 했을 것이다. 바쁘게 일만 하느라 건강을 잃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해 가족과의 추억을 잃었을 수도 있다. 무언가를 얻었다는 건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야기를 뒤집으면 무언가를 잃었다는 건 무언가를 얻었다는 뜻이다. 그는 건강을 혹은 가족을 잃은 대신 성공을 얻은 셈이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순응하면 등에 업혀가고 반항하면 질질 끌려간다.”고. 뭐야, 그러니까 인생이란 어찌할 수 없으니까 그냥 받아들이란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읽었으니까. 그러나 이건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똑같은 길을 가도 누군가는 편안하게 가고 누군가는 끌려간다. 즉, 같은 인생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거라는 가르침이다. ‘업혀간다’와 ‘끌려간다’의 차이는 ‘반밖에’와 ‘반이나’의 차이처럼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다. 내가 얼마만큼의 기대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인생은 ‘이거밖에 안 되는 인생’, 내가 원한 것과는 다르게 ‘끌려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꿈을 꾸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꿈을 꾸고 이루려고 하되 큰 기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초조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큰 기대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삶 말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중에서
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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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188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08-20
08-20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07-25
07-25
186 Forrest Gump 1994
06-08
06-08
185 누구도 나를 파괴할 수 없다 - 데이비드 고긴스
04-21
04-21
184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03-05
03-05
183 발리의 한 리조트에서 세일즈 매니저로 일한다는 것
02-29
02-29
182 돈의 심리학-당신은 왜 부자가 되지 못했는가
02-05
02-05
181 제주도의 샤브샤브에 관하여
01-13
01-13
180 아들에게
08-2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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